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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 성관계의 비대칭성


외도는 자연지도?

도대체 외도란 말을 언제부터 우리가 쓰기 시작했을까 하는 이야기를 대학시절 은사이신 교수님과 나눈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남성의 여성편력은 '자연지도(自然之道)'취급을 받았으니 외도란 생긴지 얼마 안 된 말이 아니겠느냐고 하셔서 한참 웃은 적이 있다.

사실이 그랬다. 일부일처제 결혼제도에서 정통의 적자 생산을 목적으로 하여 '결혼=배타적 성관계'라는 등식은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나,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였기에 배우자 하고만 성관계를 가지라는 '배타적 성교'는 여성에게만 비대칭적으로 강요되었던 것이다.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대칭적인 결합으로 본다면 남성에게 요구하는 것과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같거나 또는 남녀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더라도 그것들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일차적인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고 아내도 남편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여기면 배려에 있어 부부간에 '대칭성'이 형성된다. 그리고 남편이 사회에 나아가 돈벌이를 하고 아내가 그 돈을 가지고 살림을 꾸려갈 경우, 부부 각자는 비교하기 어려운 다른 범주의 일을 하지만 결혼관계 안에서 그 일들이 서로 보완이 되어 부부 모두가 혜택을 본다는 점에서 '유사 대칭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대칭성과 유사 대칭성이 많은 부부관계일수록 평등하고 민주적인 부부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외도를 허용하고 아내에게는 외도-어쩌면 자연지도-를 금지한다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성적 대칭성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조건하에서는 대칭적인 결혼관계, 평등한 부부관계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는 그런 비대칭성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비대칭성의 생물학적 이유

여성에게 불리하게 성적 비대칭성이 설정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생물학적 이유이다. 여성만이 자녀를 수태하고 분만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한계안에서 가부장의 정통적 부성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부장의 배우자 되는 여성은 남편하고만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며 행동을 제한하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유전자 감식으로 부성을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을지도 모른다는 남성들의 최대의 두려움에 대한 최선의 방어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내의 외도는 가부장의 적자 생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나 남편의 외도는 자신의 적자 생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생식기능에 이상이 올 정도로 외도에 빠져 자녀를 생산을 할 수 없게 되지 않는 한)것이다. 결혼한 남성이 비난받는 유일한 경우는 외도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 성관계를 회피하여 자녀 생산을 할 수 없게 하는 경우일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오난은 형이 죽자 관습에 따라 형수와 결혼하여 성관계를 갖는데 임신이 될까봐 질 밖에서 사정을 한다(오난에 어원을 둔 어나니즘이라는 단어는 자위행위를 뜻한다). 결혼내의 성교에 부여되어 있는 특별한 지위, 즉 적자를 생산하는 권리와 의무를 회피한 오난은 그 벌로 죽임을 당한다. 가부장의 특권을 존중하지 않은 죄인-자신의 자녀의 생산을 거부한 남성이나 남편의 자녀의 생산을 거부한 여성이나-은 죽어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적자를 배타적으로 생산시킨-결혼 이외에서는 적자를 생산할 수 없으니까-나성은 남편∙가부장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다한 셈이었다. 그들이 적자 생산이라는 남편의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 성적 쾌락까지 배타적으로 결혼한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얻어야만 한다고 말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으로 성실해야만 또는 남편이 자상하게 아내의 심정을 고려해야만 아내가 적자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생물학적으로만 볼 때 여성은 인격적 배려는 고사하고 성적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강간을 당하여도 임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녀 생산과 상관없이 아내라는 존재 자체를 배려해 달라는 요구는 여성을 인격체로 보지 않은 초기의 가부장제 결혼제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삼종지도'라는 도덕이 있었듯이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적법한 아내란 성성이 있는 성적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할 의무도 없었다. 따라서 남성들에게는 남아도는 성욕을 가지고 외도할 자유가 있었다. 남성들은 배타적 성관계 같은 도덕적인 의무에 얽매이지 않는 매춘여성이나 기생과의 관계에서 성적 쾌락을 얻을 수도 있었고, 심지어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그랬듯이 소실을 둘 수도 있었다(제2장에서 보았듯이 프랑스의 「나폴레옹 법전」에서는 남편에게 외도상대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금하고 있다. 우리 나라 양반들은 서양 남자들보다 더 큰 외도의 자유를 누린 것이다). 소실과의 성관계는 구조적으로 서자만을 생산했으므로 아무리 소실을 여럿 둔다 해도 적자 생산이라는 결혼의 목적을 방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대칭성의 사회적 이유

비대칭서의 또 다른 이유는 성적 쾌락에 관하여 남녀를 구별하는 사회적 태도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성도덕을 상징해 주는 말인 "숙녀는 잠자리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소위 '숙녀' 또는 '현모양처'등으로 불린 여성들에게는 성적 쾌락을 느끼고 표현할 권리가 없었다. 그들은 성적 존재가 아니었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다룬 명작들을 남긴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도 아내를 "자녀를 생산하는 도구'로만 보아 임신중의 아내가-성적 능력을 임신으로 완전하게 사용하고 있으면서-감히 성욕을 느낀다는 것을 표현하면 그녀를 아주 부도덕한 여성으로 취급하며 경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다른(임신하지 않은)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지면서 천부의 성적 능력을 마음껏 썼다고 한다.

이와 같이 특별히 성적으로 자유로운-동시에 집단적으로 경멸당하는-특수층의 여성이 아닌 일반여성들에게는 성에 관한 한 자녀 생산의 의무만 있었지 성적 쾌락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러니 남편에게 아내의 성적 쾌락을 위하여 노력할 의무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남편의 성적 쾌락을 위하여 노력하라는 의무도 지우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의 의무란 적자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지 남편을 성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부부 모두 서로의 쾌락을 위하여 노력을 안 해도 좋다는 점에서 대칭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비대칭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여성들에게는 성적 쾌락의 권리가 없었지만 남성들에게는 성적 쾌락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권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는 '영웅호색'등의 말로써 남성들에게 쾌락 추구를 권고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게다가 성적 쾌락은 다른 쾌락의 경우와 다르게 취급되는 점이 있다. 쾌락을 추구하게 하는 성적 충동을 자제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없는 것이다. 술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주도라는 개념이 존재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방법, 다시 말해 술과 관계하는 방법을 중요시 여겼다. 그것은 술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며 동시에 술의 영향력에 대해 배움으로써 영향력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의 경우는 다르다 주도에 대응하는 춘도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전세계의 시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많이 다르다. 프롬은 사랑의 심리적 측면을 분석했고 오비디우스는 주로 사랑의 성적 측면에 대해 썼다)은 춘도를 다른 책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시인이나 예술가들 또는 귀족 계급에서나 받아들여졌지 주도처럼 일반화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춘도는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왜 그랬을까? 성의 충동은 위험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고 성적 쾌락은 광범위하게 추구되는데 왜 성적 충동은 도덕적 훈련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종교적 훈련을 받는 사람은 금욕을 해야 했지만, 그것은 성의 충동으로부터 초월이나 도피이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훈련은 아니었다. 성적 충동이 진정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인가? 21세기를 앞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통념에는 '남자는 성적 충동을 통제할 수 없다','성적 충동을 해소해 주지 않으면 남자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매춘 여성이 없다면 남자들은 강간을 많이 할 것이다'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남성들의 성장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에게 타고난 거친 성적 충동을 세련화시켜야 한다는 것과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아들에 대한 성교육을 하는 것이 어려우니까 못하기도 하고, 남자는 성적 가해를 하면 했지 적어도 성적 피해를 보는 일이 없으니까라고 안심하며(실제로는 남아에 대한 강간이 상당히 행해지고 있다) 성교육을 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남성이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게 되는 집단인 남자학교나 군대 등에서는 성적 충동을 더욱 거칠게 만들면 만들었지 세련되게 만드는 일은 안 하고 있다. 성교육을 담당할 선생님이나 상급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성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에 젖어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1961년에 제정된 윤락 행위등 방지법이라는 법이 있다. 이 법은 윤락행위를 한 여성에게 버금을 물리는 한편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수용시설에 강제로 수용하여 교도를 받도록 하고 있으나, 윤락행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남성들에게는 아무런 교도도 받게 하지 않는다(교도는커녕 벌금형을 받은 남성조차 없었다). 이 법은 1994년도 정기국회에서 33년 만에 개정되었는데 개정된 내용을 보면 재판을 거쳐서이지만 여전히 여성을 교도시설에 수용할 수 있게 하고 남성에게는 교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윤락행위를 한 남녀에 대한 처벌만 무겁게-'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한 것이다. 1996년부터 시행될 새 법이라고 해서 매춘한 남성도 처벌할 것인가 한는 의구심이 생기지만, 나아가 개정된 법도 매춘한 남성이 교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새로움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남성의 성적 충동은 그야말로 '원초적 본능'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통제 훈련을 해보지도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니, '남자는 성적 충동을 통제할 수 없다'같은 말은 사실이 아니라 잘못된 신념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의 성적 충동은 통제될 수 없다는 통념에 대한 약간의 반증 자료도 있다. 중국과 북한 같은 공산주의 사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매매춘을 폐지하고 정책적으로 남녀관계를 통제하니 다른 나라의 남성들보다 늦게 결혼하면서도 동정인 경우가 많았으며 외도도 드물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마구 제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라는 인위적 조직 안에 사는 사람들이 그 국가 구성원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자연적인 상태를 고수할 때 국가가 그것을 내버려 두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됨의 핵심은 발달하고 변화하는 데에 있다. 타고난 것을 실현시키고 성장시키고 세련되게 만들면서 자연과는 다른-그러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인위적인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지구상의 모든 사회는 그런 발달과정에 기여한 인물들을 특별하게 대우하고 상을 주어 기리는 것이 아닌가. 도덕은 문화의 핵심 중 하나이며, 그 기능은 타고난 기질을 도덕적 이상에 맞게 길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인물의 대표적인 동양의 군자나 서양의 신사나 모두 자기통제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집단에서도 '성적 충동의 통제'를 단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성적 충동의 통제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성적 충동의 대상인 여성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의 영향력'이란 어쩌면 '술의 영향력'보다도 적은 미미한 것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술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부장적 일부일처제가 시작되었을 때 여성은 자신의 성적 쾌락의 권리를 부인당하고도 항변하지 못하는, 무시해도 좋은 무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남성들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지면서 여성의 인격-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면-은 물론 심지어는 여성의 성적 반응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칸트는 성관계란 엄격한 의미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이용하여 자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왜냐하면 절정의 순간에서 각자의 목적은 자신의 성적 쾌락이지 상대의 성적 쾌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성관계를 너무 좁게 본 것이라고 반박될 수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인간은 원하기만 한다면 성적 관계에서 상대를 물체같이 보며 그 영향력을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성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자신의 성적 쾌락의 권리를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고 추구하면서도 그 대상인 '여성과의 성관계'에 대한 도덕성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남성의 성도덕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 성적 충동을 훈련하지 않은 실질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비대칭성의 심리적 이유, 주도권

여성에게 성적 비대칭성을 강요한 심리적 이유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겠다. 하나는 남성들이 성관계에서 항상 성적 주도권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싫어한다. 아내도 성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오늘날의 남성들도 아내가 성적 욕구를 주도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혐오하는 사실을 볼 때 여성의 성성을 인정하지 않던 과거에는 얼마나 싫어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한 성문제 치료자가 말한 상담 사례를 보면 결혼한 지 15년이 지난 중년부부는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혼 후 내내 남편의 주도로 성관계를 가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밤 파티에서 약간 술에 취해 돌아온 부인이 침실로 가 남편의 배와 허벅지를 애무했더니, 남편은 아내의 손을 걷어치우며 "당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성적으로 적극적인 아내가 다른 사람-말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성적으로 적극적인 아내가 다른 사람-말하자면 창녀-처럼 보여서 거부했던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거부당하고 그런 행동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라는 무언의 압력을 받은 아내는 그 후 섹스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려 남편의 요구를 계속 거부했다. 이번에는 남편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 부부는 1년 간이나 성생활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 부부는 성문제 치료자를 찾아왔고, 치료자는 그 부부의 비대칭적인 성적 주도권을 바로잡음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푼 것이다.

이런 비대칭성은 케이트 밀레트가 「성의 정치학」에서 분석했듯 이 20세기 문학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D.H 로렌스의 <아론의 지팡이>는 '권력을 여자를 지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는 로렌스의 관념'을 보여 주는 작품인데, 거기에서 주인공 아론은 '성욕이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유일한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냉정하게 추정하면서도 아내에게서 그것을 박탈하는 데 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주도권의 생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지의 한 표현이다. 니체의'권력의지'나 아들러의 '우월에의 욕구' 등을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에겐 강자가 되어 타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가부장제에 의해서 보장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의지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러 떠나는 십자군이 아내의 몸에 정조대를 채우고 자물쇠를 잠글 때- 많은 십자군들은 정조대의 열쇠를 품고 전쟁터에서 죽어 갔다.-그리고 조선시대에 목숨보다 소중한 정조를 지키지 못한 아내를 자녀 목에 매달 때, 동서의 가부장들은 얼마나 큰 권력감을 느꼈겠는가. 사회에서는 개인 능력의 차이로 권력의지를 발휘하지 못한다 해도, 남녀간의 비대칭성은 남성들에게 언제든지 권력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곳을 보장해 준 것이다.

비대칭성의 심리적 이유, 불안한 남성자아

그 다음 지적하고 싶은 점은, 남성들의 심리적 진실이란 여성이 무력하여 무시해t다는 것과는 반대로 여성의 영향력을 무척 두려워하여 그 두려움에 대한 방어로 여성의 영향력을 애초 무시해 버리려고 애썼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20세기의 학문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만, 남성의 생리적 그리고 심리적 기반은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한다. 우선 생리적으로 보면 남성의 성염색체인 Y는 여성의 성염색체 X보다 약하여, 남아의 사망률이 여아의 사망률보다 높고(영아 살해에 있어서는 여아의 사망률이 높다.)남성이 병에 걸리는 확률이 여성의 경우보다 높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키와 몸무게 등의 차이로-평균적으로 남성의 몸의 크기가 여성의 1.5배라고 한다.-남성이 여성보다 생리적으로 우월하다고 피상적으로 믿어왔는데 심층적인 연구는 그렇지 않은 점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체계화시킨 고전적 정신분석이론 이후에 발달한 신 정신 분석이론 중 대상관계이론 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보다 심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개체의 선천적인 발달 단계에 관심을 가져, 어머니가 출생 직후부터의 아이에 대한 일차적인 양육자라는 사실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남녀의 차이는 성격발달 단계에서 구강기 ,항문기 다음인 성기기에서 크게 부각된다. 아동이 성성은 구강기에서는 자신의 입술에서 자족적으로 쾌감을 느끼고 항문기에서는 항문에서 자족적으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성기기의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자족적이지 못하고 대상에게 성애를 느끼게 된다. 성기기에서 남아는 이성인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어, 동성인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달시키고 여아는 이성인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어 동성인 어머니를 경쟁자로 여기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발달시키는 것이다. 남아난 여아나 이성부모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성애를 포기하고 동성 부모와 동일시하면서 미래에 만나게 될 이성애의 상대자를 기다리기로 하면 성기기의 콤플렉스가 건강하게 해소되는 것이다. 물론 성기기의 아동에게 일어나는 근친간의 성애 드라마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성기기 성기기의 다음 단계는 더 이상 성애의 발달이 없는 잠복기이며 마지막 단계는 성인으로 맞는 생식기로 이성애자로 성장한 남녀는 이성애의 대상을 만나 사랑하고 생식을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남성이 된다는 일이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성의 기본을 남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서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여성이다. 여성은 음경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성기기에서 음경 선망이라는 콤플렉스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결핍이 심리적 콤플렉스를 가져온다면 인간의 심리에 음경 선망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카랜 호나이라는 정신 분석가는 남성들에게 유방 선망과 자궁 선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치료 사례를 통해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정신 분석이론인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개체의 생물학적 발달보다는 개체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남녀의 발달과정이 '비대칭적'리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자녀 양육 방식이란 이성인 어머니가 아이를 수태하고 분만할 뿐만 아니라 양육하며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방식이다. 그 방식에서는 여아뿐 아니라 여성이 아닌 S남아도 어머니와 공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아이는 자신이 속한 주변환경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머니가 남아와 여아 모두의 일차적인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 심리적으로 중요한 비대칭성이다.

따라서 남아는 후에 개체로서의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어머니와 동일시 단계를 벗어나야만 하는데 어머니와의 일치감을 벗어나려면 '어머니 거부'라는 상당히 힘든 작업을 해야만 하게된다. 이미 자신의 것으로 여기던 것을 이제는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삶의 초기에 일어난 일을 의식에서 제거한다는 일은 나중에 일어난 일을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정신 질환에 걸릴 때도 태어나자마자 환경의 영향으로 정신장애를 일으키면 정신분열증이 되기 쉬워 치유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지 2,3년 후에 환경의 영향으로 정신장애를 일으키면 신경증이 되기 쉬운데 정신분열증에 비해 치유될 가능성이 높은 정신질환이다.

어머니와의 일치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남성은 요즘 보기 쉬운 마마보이나 피터팬 증후군을 보이는 자라기 싫어하는 남성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일치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과격하게 내면의 감정을 억압한 남성은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소외된 냉혹한 남성이 된다. 이런 이유들로 남아의 자아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형성되기 쉽다는 것이다.(반면에 여아는 동성인 어머니와의 동일시 단계를 부드럽게 벗어날 수 있어 안정감이 있는 자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여아의 문제점은 독립심이 덜 발달한다는 것이다).이렇게 자신의 존재 기반이었던 것을 부정해야한다는 과제 앞에서, 남성들이 여성의 영향력을 벗어나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영향력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수천 년 전의 남성들이 그런 심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을 리 없지만 그들은 직관적으로 자신의 상대적인 취약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방어하려고 하는 한편 여성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데까지 약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1949년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만들어진다."라는 명제로 <제2의 성>을 썼다. 그 책은 여성학의 고전이 되었는데, 50여년 정도 지난 1992년에 같은 나라에서 남성학의 고전이 될만한 책이 출판된 것은 재미있는 우연인 듯 하다.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인간은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XY: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를 썼는데 그 책에서 남성 만들기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남성들은 남아를 '진짜' 남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는 데, 그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남성의 정체성이란 것은 커다란 어려움을 극복한 다음에야 얻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첫번째 공통점은 '넘어야 할 위기의 문턱이라는 생각'이다. 여아는 월경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세계로 입문할 수 있는 반면에 남아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고는 남성의 세계로 입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시련의 필요성'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시련을 겪지 않으면 남성성이 약해지거나 심지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세 번쩨 공통점은 남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무효화되거나 지워져 버렸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성인입문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복수에 대한 두려움'과 '동성애로서의 근친상간에 대한 걱정'때문이라고 한다.

원시 부족이 남아들에게 치르게 하는 성인식을 구체적으로 보면 어머니로부터 강제로 분리 시킨다는 점과 결혼할 때까지 남성들끼리 살게 한다는 점등이 공통적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부족에서 시련으로 피부난자, 할레, 음경 껍질 도려내기, 피가 날 때까지 매질하기, 신체에 상처내기 등을 행하며 입문식 때까지 쌓아 온 여성적인 성격을 쏟아 버리게 하기 위하여 토라는 음식을 먹여 억지로 토하게 하는 부족도 있다고 한다. 어떤 부족은 '정액이 남아로 하여금 어머니의 재내 밖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힘을 준다'고 ALE어 남아에게 성인남성의 정액을 먹게 한다고 한다.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빨면 여성화가 되니 남성의 액체를 마셔야만 남성화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까이 있으며 친해지는 사람과 닮는 다는 법칙에 충실한 것인데, 남성끼리의 동성애는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에도 남성교육의 방편으로 존재했다고 한다. 남성들은 남성끼리 모이면서 힘을 기른 셈이다.

그렇게 힘들게 남아를 남성으로 만들면서도 가부장제의 남성들은 남성 만들기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 , 즉 어머니가 아이의 양육을 독점하고 있는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바텡테가 "가부장 제도는 아버지가 갓난 아기를 포기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고 .했듯이 가부장제는 철저한 성별 분업에 그 기초를 두고 잇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바로 그 성별 분업의 내용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바로 그 성별 분업의 내용이다. 어머니가 아이의 양육을 독점하여 남성성에 문제가 생기니, 아버지도 아이의 양육에 참여하자고 하는 것은 성별 분업의 내용이다. 어머니가 아이의 양육을 독점하여 남성성에 문제가 생기니, 아버지도 아이의 양육에 참여하자고 하는 것은 성별 분업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만일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양육을 담당한 다음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하면 무엇을 근거로 막을 것인가? 더 이상 "그것은 여성의 고유 업종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여성의 고유업종 -자녀 생산과 양육-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별 분업은 가부장제의 대전제였기에 가부장제을 유지하고자 하면서는 감히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른 척 했던 것이다.

남성의 자기 방어

겉으로 볼 때 '배타적 성관계'의 비대칭성은 남성이 정치, 경제적인 힘을 가졌기 때문에 여성에게 강요된 것이다. 이 명제의 진실성은 여성의 정치, 경제적 힘이 조금씩 강해져 감에 따라 비대칭성이 못한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남성들은 사정하여 정자를 주면 그만일 뿐 여성처럼 배란-수태-분만-수유의 생물학적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분만 후에 자신의 아이임을 인정하여 성을 물려주고 이름을 붙여 주는 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남성의 입장에서 그 과정 전체를 소유하여 자신의 약점을 방어하고 싶어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고 여성에 의해 길러지는 남성에게는 어머니(또는 유모나 할머니 등의 여성 양육자)의 영향력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노력하여 의식의 차원에서 어머니의 영향력을 벗어나다 하더라도 무의식의 차원에서까지 벗어날 수 는 없는 것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여성을 거꾸로 소유하고 지배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했다 하여도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배타적 성 관계'의 비 대칭성이 남성의 강점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약점에 의해서도 여성에게 강요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